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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문학관

여행기

by 낮부엉이 2010. 6. 4.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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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길이 전하고 널리 알리는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과 관련,
흩어져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 곳에 모아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그의 출생지인 원천리 불미골 2,300평의 터에 건평 176평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에는 선생의 흉상과 육필원고, 독립운동자료,시집,사진등이 전시되어있고,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과 감옥생활 모습등도 재현해 놓았으며, 
2층은 낙동강이 굽이져 흐르는 원천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기획전시실, 영상실과 세미나실, 탁본체험코너, 詩想전망대등이 있다.

 

 

 

 

 

 이층에서 내다 보이는 마을 남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이다. 육사는 어린시절 동리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보면서 흰 돗단배에 대한 시상(詩想)을 키웠으리라.

지금도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강가로 가서 둑길을 걸으면 고향에 대한 향수가 느껴져 온다. 

 

 

 

 

 육사문확관 관장, 조영일 시인

 

 

 

 이육사는 이퇴계 선생의 14대손이다.

 

 

 

 

 암흑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이육사 문학세계
'광야' '절정''청포도' 와같은 맑고 아름다운 서정시는 한국 문학사에 절정이고
17번의 체포 감금 투옥등의 독립활동으로 온 몸을 불사른 겨레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청포도

                                            이육사

 

 

 

이육사의 이름 

 

그의 호적등본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고 자(字)는 태경(台卿)이며, 어릴 때 이름이 원삼(源三)이었다. 만 18세가 되던 1922년, 영천 백학학원에 다닐 때도 원삼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고 동기생 정연활이 증언했다. 
 
 
1926년 중국 중산대학 동창생 명부에 '이활(李活)'로 기록되어있다. 1927년 가을부터 1929년 5월까지 옥고를 치른 뒤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도 '이활'을 사용했다.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그의 첫시 {말}이 '이활'이란 이름으로 게재되었다. 
 
 
1930년 그의 글에서 처음 사용된다. 1년 7개월 동안 그는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린 죄수였다. 264는 수인의 번호였다. 일제의 통치에 저항하는 뜻과 식민지 세상을 비웃는 그의 마음, 일제 식민지에서 영원한 죄인이라는 자조섞인 웃음이 담긴 이름이 아닐까. 
 
 
 1932년 의열단(義烈團)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제1기생 입학 명단에 육사(陸史)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죽일 육(戮) , 역사 사(史) 육사(戮史)라는 이름을, 바로 이어서 고기 육(肉) 설사할 사(瀉)를 사용했다. 집안 아저씨인 이영우가 " 육사(戮史)는 역사를 죽인다는 표현이니,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말 아닌가? 의미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차라리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표현이 되는 '陸史'를 쓰는게 좋겠다"고 권했다. 陸 (높고 평평한산의 꼭대기) 
 
 
 1935년 6월 이후 거의 대부분 '이육사(李陸史)'가 사용되었다.

 

이육사문학관  홈페이지 http://www.264.or.kr
주소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900
전화 054-840-6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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