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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변에 국악소리 가득한 <난계 박물관>

여행기

by 낮부엉이 2010. 7. 1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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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계박물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519-1

043-742-8843

 

우리나라 3대 악성중 한 사람인 난계 박연(蘭溪 朴堧)선생의 음악적 업적과 예술적 혼을 계승,
발전시켜나가고, 국악에 대한 이해와 교육을 통해 국악 연구의 저변을 확대하며, 국악 교육장으로서의
활용을 통해 국악의 예술적 가치를 전수하고, 국악의 본고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특히 난계국악시제작촌은 영동군과 국악기 제작 전문업체와 협약을 통하여 국악기를 생산 판매함으로써 국악의 발전과 국악기제작 계승, 보존하여 국악의 고장, '영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상징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난계 국악원은 난계 박물관과 마주하고 있었다.

금강을 끼고 울려퍼지는 국악의 진동은 영동지역을 흥이 절로 돋게 들썩이고 있다.

체험생들이 꾸준히 몰려온다. 그만큼 국악은 이제 우리들에게 친밀한 호흡같은 존재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우리 국악기를 만들어 낸 난계선생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내용은 난계실에서 영상으로 잘 볼 수 있었다.  규모는 별로 크지 않으나 국악체험관이나 국악 박물관이 무척 알차다는 느낌을 준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려는자의 순수한 열정이 국악기에서 우뢰와 같은 음을 만들어 낸다.

 

휘몰이 장단, 진양산조, 그 가락에 운율에 빠져드는 한민족의 긍지를 고취시킨다.

 모두들 진지하다.

 장구채를 처음 든 나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이 장단 가락의 고저!

 누구나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우리의 것이다.

 쪽창을 통해 본 풍경에는 금강이 흐르고

 소리는 강물에 실리고

 교실안의 열기는 대단하다.

 

 

 

 

 

 

 

 

아쟁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도자기 오카리나 

 

 

 

 

 이 두 현악기가 어울려야 멋진 소리가 난다고 한다.

<금>과<슬>이다.

부부금슬도 여기서 따온 말이라 한다.

 

 난계가 친히 왕(세종)에게서 받은 하사지

난계는 어린 세종의 스승이었고 훗날 세종을 도와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난계 박연 부부의 초상
국립국악원이 소장하고 있는 난계 박연(朴堧.1378~1458) 부부의 초상.

박연의 고향인 충북 영동군은 가로 53㎝ㆍ 세로 99㎝의 이 초상 복제품을

난계사(蘭溪祠.심천면 고당리)에 봉안키로 했다.

 

 

 

박 연(朴 堧/1378 -1458)
조선 초기의 음악가. 호는 난계이다.
한국의 3대 악성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태종 11년 (141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대제학에 이르렀다.
대금을 잘 불고, 현경을 만들었으며, 악기의 신조와 용법의 개량, 악곡의 개정과 형식의 확립, 아악·향악·당악의 음계조정, 정재무의 정리, 악제의 혁신 등 한국 고유 음악의 토대를 굳혔다. 시호는 문헌이다.

 

조선 인조 때에 귀화한 네덜란드인. 일본을 향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했고, 병자호란 때 출전했다. 포로 왜인의 감시·통솔, 홍이포의 제조법·조작법을 지도했다

 

본명은 벨테브레(J.J.Weltevree)이다. 홀란디아호 선원으로 아시아에 왔다가 1627년 우베르케르크호로 바꿔 타고 일본을 향하여 항해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 동료 D.히아베르츠, J.피에테르츠와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고 상륙하였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하였는데, 병자호란 때 세 사람 모두 출전하여 박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사하였다. 그는 포로가 된 왜인들을 감시·통솔하는 한편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의 제조법·조작법을 지도하였다. 1653년 H.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서울로 호송하고, 하멜이 도감군오()에 소속되자 그를 감독하는 한편 조선의 풍속을 가르쳤다. 조선여자와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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