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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댐지나 정약용, 실학박물관을 찾아서~

문화유산

by 낮부엉이 2011. 8. 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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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물이 지나고 난 뒤 팔당댐을지나 양수리로 물구경을 나갔다.

경기도 하남시와 남양주시를 잇는 팔당댐도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gksek  장마철 수위 조절을 위해 수문이 열리는 날엔 거대한 폭포수를 연상시키며 장관을 연출하는데,  얇게 피어오르는 물안개도 운치를 더한다.

조금만 더 가면 조선 시대 실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도 만날 수 있다.  이왕 지나는 길에 정약용님의 생가도 둘러보고  실학박물관도 둘러볼 수가 있다.

팔당댐을 지나 팔당댐 윗쪽 <봉주르>카페겸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이동, 상수원보로구역인 팔당호를 바라보며 달리지 않는 철길 위를 산책하던 길이 이제는 아쉽게도 자전거길로 시멘트길로 변했다.

<양생중>이란 글씨가 있는걸보니 앚그제 쯤 비 끝나고 서둘러 만든 듯 하다.

 

그리고 <다산길>도 산책길로 좋다고 하는데 가보질 못했다. 다산길 18길이 다 만들어지면 양수리물을 쳐다보면서  산책하기에 그지 없이 좋은 길이 될 것이다.  그럴줄 알았으면 팔당댐길을 걷지말것을... 다산길 산책은 다음으로 미루며~

 

 

  

  

 

 

 

 

 

 

1762(영조 38) 경기 광주~1836(헌종 2).

 

정약용(丁若鏞, 1762년 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 ~ 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요한, 시호는 문도(文度)이다.조선 후기의 실학자.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유배 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가 있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순조)때
정약용·채제공 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천주교 탄압은 그뒤에도 계속되어 1815년(을해박해)과 1827년에도 많은 교인들이 검거되어 처형당했다. 한편 수렴청정기에 공노비(公奴婢)를 없애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하는 등 조선 후기의 신분질서 변화를 추인하는 정책이 나오기도 했다.

생가 사랑채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 더보기 c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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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영조 38) 경기 광주~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 /정약용 동상, 서울 남산공원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본관은 나주(羅州).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자호는 다산(茶山)·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되어 나타난다.
먼저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주로 관료생활의 시기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15세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이가환(李家煥)과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했다. 이미 이때부터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의 저서를 탐독했다. 이처럼 유교경전과 선학의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여, 1783년(정조 7)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었다. 이무렵 이벽(李檗)을 통하여 서양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서양서적을 접했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아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지평·수찬을 지내고 1794년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사건(周文謨事件)에 연루되어 금정찰방(金井察方)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다시 소환되어 좌부승지·병조참지·동부승지·부호군·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다산은 30대초까지는 아직 젊은 중앙관료로서 경학사상 등 학문체계는 물론 사회현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깊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도암행어사를 비롯하여 금정찰방 곡산부사(谷山府使) 등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촌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이를 실천해보고자 했다. 1799년 중앙정계에 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응지진농서 應旨進農書〉의 검토를 통해 토지문제를 농업체제 전반과 연결시켜 구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이후 기본 생산수단인 토지 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정치적인 문제 해결의 근본이라고 인식하고 현 농업체제를 철저히 부정한 위에 경제적으로 평등화를 지향하는 개혁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1799년에 저술한 〈전론 田論〉의 여전제(閭田制)는 이같은 논리가 가장 강렬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여전제의 내용은 토지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지주제를 부정하고 토지 국유를 원칙으로 하는 기초 위에, 향촌을 30가구의 여(閭) 단위로 재편성한 다음 여장(閭長)의 통솔하에 공동노동을 통해 경작하고 농민의 투하노동력을 기준으로 생산물을 분배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관련된 조세제도 개혁책으로서 정액제(定額制)를 취하고, 역제(役制)의 경우 재편성된 향촌제도와 관련시켜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원칙으로 하면서 호포제(戶布制)로의 개혁을 고려했다. 이러한 여전제의 보급을 위해서 여내(閭內) 농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무위도식하는 선비들에게 실생활에 필요한 직업으로의 전환을 유도하고자 했다. 이처럼 여전제는 농민경제의 균산화(均産化)와 안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생산성 향상을 통한 사회적 부의 증대를 위해 노동력의 기능을 강조한 공동농장·협동농장적 경영론이다. 이는 종전의 한전론(限田論)·균전론(均田論) 등 토지분배에만 초점을 맞춘 개혁론에 비해 농업생산의 사회화 문제 등 농업생산이나 농업경영 전반의 변혁까지도 포괄하는 논리였다. 그러나 시행의 전제가 되는 국유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장 실현될 수 없었던 토지개혁방안이었다. 특히 〈전론〉에서 농업생산의 사회화 문제와 연결하여 공상(工商)을 농업에서 완전 분리시켜 독립적 사회분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당시 상품화폐경제와 수공업 발전의 현실을 염두에 둔 견해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농업생산에 주력하는 중농정책(重農政策)이 견지되어 사족의 상업·공업에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이상의 사회개혁론과 궤를 같이하여 혁신적 정치개혁론으로 제시된 것이 〈원정 原政〉·〈원목 原牧〉이다. 여기에서 그는 아래로부터의 정치개혁 이념을 표방하고 있다. 〈원정〉에서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왕정의 제일책으로 삼고 물화의 유통과 교환을 촉진하며 지방생산력의 불균등 발전을 완화하고 정치적 권리를 균등하게 해야 한다"고 하여 파격적인 체제개혁론을 주장했으며 이는 만년에 저술한 정치권력론·역성혁명론으로서의 〈탕론 湯論〉과 이념적 기초를 같이한다. 그는 〈원목〉에서 태고 이래 민(民)의 자유의사와 선거에 의해 이장(里長)·면정(面正)·주장(州長)·제후(諸候)·천자(天子) 등 각 계층의 통치자들이 발생했음을 지적하고 이들이 만약 민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들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행동하는 경우, 민은 자신들의 자유의사로써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가발생에 관한 학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자본주의 발생 초기 유럽의 사회계약설과 유사한 논리가 되며 해석에 따라서는 정치의 민주주의적 합의제, 선거제, 법치주의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유럽의 경우와 달리 당시의 역사발전 사실과 부합되지 않으며, 다만 극도로 부패한 봉건사회에 대한 반기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같은 정치개혁론은 그의 사회 경제개혁론과 함께 당시의 현실 속에서 혁명을 수반하지 않고는 실현불가능한 이상론이며 궁극적인 지향점은 밝혔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지니면서 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론으로 체계화되기는 어려웠다.
그의 학문과정과 생애 후기는 주로 유배생활의 시기이다.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벽파는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1801년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때 이가환·이승훈·권철신(權哲身)·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 그리고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1808년 봄부터 머무른 다산초당은 바로 다산학의 산실이었다.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다. 61세 때에는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했다. 그는 유배생활에서 향촌현장의 실정과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유배의 처참한 현실 속에서 개혁의 대상인 사회와 학리(學理)를 연계하여 현실성있는 학문을 완성하고자 했다. 〈주례 周禮〉 등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독자적인 경학체계의 확립과 '일표이서'(一表二書)를 중심으로 한 사회전반에 걸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회개혁론이 이때 결실을 맺었다(→ 다산학).
먼저 〈경세유표 經世遺表〉는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하여 현재의 실행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나열하여 우리 구방(舊邦)을 새롭게 개혁해보려는 생각에서 저술했다"고 하여 당시 행정기구와 법제 및 경제제도를 대폭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경세유표〉의 구성은 경전에서의 이념적 모델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도의 변천과정을 아울러 참조하여 개혁론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목민심서 牧民心書〉는 "고금의 이론을 찾아내고 간위(奸僞)를 열어젖혀 목민관에게 주어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마음씀이다"라고 하여 현 국가체제를 인정한 위에서 목민관을 중심으로 한 향촌통치의 운영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흠흠신서 欽欽新書〉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옥사에 대해 "백성의 억울함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통치자의 인정(仁政)·덕치(德治)의 규범을 명확히 하고자 저술되었다. 제도개혁에 있어서 〈경세유표〉가 전국적 범위에서 국왕·국가가 집행할 것을 모색한 데 비해 〈목민심서〉는 군현의 범위에서 목민관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흠흠신서〉는 〈목민심서〉의 형전(刑典)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같이 일표이서는 저술동기와 내용에서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1817~22년에 기초, 완성되어 후기 개혁론의 대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일표이서의 개혁론은 경학사상체계와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면서 체계화되었다. 정약용은 〈주례〉 속에서 '호천상제'(昊天上帝)의 개념을 원용한 상제관(上帝觀)을 형성하여 전통적인 천명사상(天命思想)을 매개로 이를 군주와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천명은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바뀌어 항상 유덕(有德)한 사람에게 옮겨진다는 것이다. 덕의 유무는 민심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므로 군주권의 근원은 결국 민의에 달려 있는 것이며, 천명 그 자체가 통치권의 궁극적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다산은 군주를 정점으로 한 통치질서를 회복하여 치세(治世)의 근본을 확립하고자 했지만 그와 동시에 군주의 우월성은 민의에 의해 한계가 규정된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상제와 직결된 왕권과 상제와 직결된 민의 자주권 회복에 의해 하나의 통일된 통치체계를 수립하려 할 때 그 모습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으로 나타나며 사적 중간지배층의 배제는 필수적인 사안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표이서에서 표방되는 개혁론은 전기에 비해 훨씬 온건한 것인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현실을 크게 고려하면서 실현 가능한 점진적인 방안, 단계론적 시행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경세유표〉의 〈전제 田制〉에서는 우선 토지국유제하 농민의 개별적 점유를 원칙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를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토지국유의 실현이 불가능한 상태를 전제하여 차선책으로 정전제에서 동시에 시행되었던 구일세제법(九一稅制法)만이라도 원용하려는 방안을 제기했다. 이는 토지제도의 개혁보다는 국가재정과 밀접한 조세제도의 개혁, 일체의 중간수탈 배제를 목적으로 한 운영의 합리화를 통해서 현안을 해결하려고 한 것으로서 점진적이고 과도기적인 개혁방안이라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다산은 사민구직(四民九職)의 직업분화와 직업의 전문화를 강조하고 사회분업을 통한 경제발전의 길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먼저 상업의 경우 농업과 완전히 분리시켜 대등하게 발전시키며 상업적 이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조세개혁을 통해 상인들을 보호하며 해외 상업을 발전시키려 했다(→ 이용후생학파). 이를 위해 동전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금화·은화와 같은 고액화폐의 발행으로 원격지간 교역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즉 상업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되 특권적 대상인은 억제하고 중소상인은 보호하는 방식을 도모했다. 다음으로 수공업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기술도입론을 강조했다. 〈목민심서〉에서는 지방 차원에서 민간 직물업에 관련된 기술도입을 역설했고 〈경세유표〉에서는 토목공사기술 등을 국가 차원의 제도개혁을 통해 적극 도입하고자 했다. 이는 그의 중앙관제 개혁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즉 기술도입의 주체인 국가기구가 강력하게 민간산업을 보호·통제하고 기간산업을 관장함으로써 대상인의 횡포에서 중소수공업자를 보호하려 했다. 국영광산론 역시 천연의 부에 대한 특권층의 자의적 이용을 배제하여 국가 통제하에 두며 그 이익을 공전(公田) 매입에 돌림으로써 전체적으로 소농민의 이익이 되게 하는 방안이었다. 이밖에 도량형의 전국적 통일, 물화유통을 촉진하기 위한 교통수단의 정비를 제안했다. 이는 18세기말과 19세기초 유통경제의 발전과정을 염두에 둔 논리일 뿐만 아니라 그의 체제 전반에 걸친 개혁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가 제기한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에는 주자학과 대비되는 면모가 있었다. 첫째, 주자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에 기초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일리(一理)로서의 태극이 관통하고 있음을 주장한 데 비해 다산은 천도(天道)와 인간세계를 분리하여 각각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주자학의 계급성과 불평등한 인간관을 비난하고 인간세계의 질서는 변화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요순 3대의 제도에서 그 규범을 찾으려고 했다. 한편 그는 천인분리를 상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천의 존재를 별도로 언급했다. 이때 천은 모든 인간과 개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모두 존엄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 기질에 따른 인간성의 차등설을 비판하고 우수한 능력자는 특정 신분에서만 배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의 능력주의는 신분제에 입각한 국가의 교육, 과거,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으로 연결되었다. 셋째, 욕망관[人心道心說]에서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되 적절한 통제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했다. 무제한적으로 욕구를 인정하는 것은 특권층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 본 그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적 환경에 좌우된다고 보아 구체적인 사회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주관적 심성 문제에 치중한다거나 도덕적인 호소에 의한 해결방안을 내세우는 주자학과 대별되는 주장이다. 그는 전통적 관념론에 몰두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론적 세계관을 지향했다. 이에 따라 천문·기상·지리·물리 등 제반 자연현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그의 자연과학 사상의 기초는 우주관에서 비롯되는데, 전통적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논박하고 서학과 지리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원설(地圓說)에 관해 논증했다. 물리학적인 현상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록 렌즈가 태양광선을 초점에 집중시켜 물건을 태우는 원리, 프리즘의 원리를 이용한 사진기 효과 등을 밝혀냈다. 또한 종두법(種痘法)의 실시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종두심법요지 種痘深法要旨〉를 저술했고, 각종 약초의 명칭·효능·산지·형태 등을 조사 검토하여 생물학적인 연구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인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개발로 연결되어 농기계, 관개수리시설 및 도량형기를 발명하고 정비했다. 또한 한강의 배다리[舟橋]를 설계하고, 수원성의 축조시 거중기·고륜(鼓輪)·활차(滑車) 등의 건설기계를 창안했다. 이와 함께 〈기예론 技藝論〉에서는 방직기술·의학·백공(百工)기술을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으며 〈원정〉에서는 수리관개사업·식수(植樹)·목축·수렵·채광기술 및 의학을 깊이 연구해야 농민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과학정책론을 제시했다.

 

 

 

 

 

 

 

정약용(丁若鏞, 1762년 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1] ~ 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는 미용(美庸), 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2]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요한,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중농주의 실학자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유배 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3]가 있다.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1762년 음력 6월 16일경기도 남양주시 마재에서 태어난 후 진주 목사를 지낸 부친 정재원(丁載遠)에게서 학업하였다.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고산 윤선도의 오대손녀인 해남 윤씨와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니 약용은 넷째 아들이다.

일곱 살 때에 '산'이라는 시를 지은 것이 남아있는데,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이라는 책을 내었다. 9세 때 모친상을 당해 맏형수 경주 이씨와 서모 김씨의 손에서 자랐다.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명의 이헌길의 진료로 살았다.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고, 이것은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생명들을 구한다. 또한 정약용은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1776년에 승지 흥화보(興和輔)의 딸 풍산 홍씨와 혼인하여 6남 3녀를 낳았으나 생전에 4남 2녀를 잃었다. 누님의 남편으로 여섯 살 위인 이승훈, 큰형의 처남이며 여덟 살 위인 이벽과 친하게 지내면서 학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만났다. 이승훈은 조선에서 최초로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성호 이익(李瀷, 1629~1690)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에게서 성호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 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성장과 공직 생활

결혼하던 해에 부친이 벼슬길에 다시 나가게 되어 한양으로 올라가 살게 되었다. 16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19세 때는 예천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1783년에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같은해 음력 9월 장남 학연이 태어났다. 22세에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학문이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23세 때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25세 때 차남 학유가 태어났다.

1789년(정조 13년),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를 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승정원]의 가주서, 예문관 검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시] 해미면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31세이던 [1792년]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1794년에는 성균관에서 강의를 하게 되고, 음력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고 이듬해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천주교] [사제|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교우 [강완숙]등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전교를 하다가 적발된 [주문모] 사건에 휘말려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 [곡산]부사 등을 지냈다.

곡산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는데,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던 것이다.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편집] 천주교 박해 연루

신유박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00년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적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펴던 정조는 노론 진영에서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자, “사교(邪敎)는 자기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다.”라는 그러니까 성리학이 바르게 교훈된다면 성리학에 반(反)하는 천주교는 스스로 없어질 것이니 탄압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윤지충권상연이 천주교 예식으로 모친의 장례를 치른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관련자들을 처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천주교가 성리학 전통을 부정할 경우에는 탄압하였다. 임금정조가 승하하자, 이듬해 정월 조선 천주교회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천주교 탄압령을 시작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이를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신유박해(辛酉迫害)라고 부른다.

신유박해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정치적 공격으로, 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鐵身)·이승훈(李承薰)·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최창현(崔昌顯) 등이 연루되었으며, 이 박해에 정약용과 그의 두 형인 정약전(둘째 형), 정약종(셋째 형)도 연루되었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4] 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무관심한 비신자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장형을 받던 중 죽었다.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의 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으며,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편집] 말년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음력 2월 22일에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였다.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신신당부로 이른 말은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에서 버티라"는 것이었다.

[편집] 철학 사상

  • 당시 주자학을 절대시하여 이기설(理氣說)·예론(禮論) 등의 논쟁에만 골몰하던 학계의 현실을 개탄하고 보다 참되고 가치있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을 건설하기 위하여 한대(漢代) 이후의 오도된 유학을 거부하고, 공자·맹자의 원시 유학 수사학(洙泗學)이라고도 부른다. 원시 유학 수사학(洙泗學)으로 돌아가 유학의 본질을 파헤쳐 후인에 의하여 왜곡되고, 날조된 이론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 이이·유형원·이익의 경세학적 태도를 이어받아 새 시대의 새 학문을 건설하려고 하면서, 당시 중국에 유입되고 있던 서양의 종교·과학 등에 접촉하여 이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 새 학문의 목적을 고증(考證)·경세(經世)·목민(牧民) 등에 두고 공자로부터 재출발하여 전연 독자적인 체계를 수립하였다.
  • 천(天)을 유형천(有形天)과 주재천(主宰天)·역리천(易理天)으로 구분하고, 주재천에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 천명(天命)을 정치적으로는 인심(人心)으로, 윤리적으로는 정명(正命)으로 보아 백성을 위한 군자(君子)의 사명을 강조하였다.
  • 주자의 천리설(天理說)과 이기설(理氣說)을 부정하고 천명이 도심(道心)에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 인성론(人性論)에 있어 인간의 본성은 기호(嗜好)라는 성기호설(性嗜好說)을 주장하고, 사람에게는 도의지성(道義之性)과 금수지성(禽獸之性)의 양성(兩性)이 있음을 밝혀 이들 양자간의 갈등을 인정하였다.
  • 인물성동이논변(人物性同異論辨)에 있어 한원진의 인물성이(人物性異)를 지지하면서도 기질(氣質)의 성(性)은 같되 본연의 성은 다르다는 새로운 입장을 취하고, 주자학의 기질지성청탁수박설(氣質之性淸濁粹駁設)을 부정하였다.
  • 주자의 이기론(理氣論)을 전면 거부하고, 공자·맹자의 양기설(養氣說)을 다시 주장하고 이를 목민(牧民)사상과 연결지었다.
  • 역리(易理)의 성립과정을 합리적·과학적으로 해명하여 음양(陰陽) 64괘(卦) 등을 미신적인 교리(敎理)로 보는 데 반대하였다.
  • 성인(聖人)을 신격화하는 데 반대하고, 인간은 누구나 성(誠)을 다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 공자의 충서(忠恕)·효제(孝悌) 이외에 자(慈)를 강조하여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의무·사명으로 하였다.
  • 성정중화론(性情中和論)에 근거하여 예악중화론(禮樂中和論)을 전개하고 원시 유교의 왕도(王道)사상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정약용은 한나라 이후 유학의 병폐·타락을 성리(性理)·훈고(訓話)·문장(文章)·과거(科擧)·술수(術手) 등 다섯 가지로 지적하고, 공자에게로 돌아가 보다 합리적이고 건전하며 실제적인 신유학(新儒學)을 건설하여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한 주체적·혁명적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편집] 평가

정약용은 유원형(柳馨遠)·이익(李瀷)을 통해서 내려온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했다. 한국 근세에서 남인학파(南人學派)의 불평의 비판과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인 태도에 비하여, 다산은 남인학파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다분히 실제적인 경험을 지녔고, 자기의 학문·사상의 체계화를 정리한 귀양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보내기까지의 중앙 관리의 경력, 지방행정의 경험, 연천(連川) 방면의 암행어사(暗行御史) 행각, 청년 시절의 왕환(往還)과 부친의 임소(任所)에 수행한 견문, 그리고 귀양살이 등은 그대로 생생한 교훈이며, 평생을 통하는 힘이었다.

이와 같은 문견(聞見)과 경력은 그의 사상에 현실적인 인식과 자료로 제공되었다. 다른 실학자들처럼 성리학·천문·지리·역상(曆象)·산학(算學)·의복(醫卜)에 관련된 저서는 물론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은 모두 다산학(茶山學)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사상의 총괄 편으로 정박명절(精博明切)하며 탁견(卓見)이 아님이 없다.

이러한 사상이 급속도로 붕괴해 가던 조선사회에 적절히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다산이야말로 조선조 학계에 전개된 진보적인 신학풍을 한 몸으로 총괄·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인 것이다. 일찍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선생(茶山) 1인에 대한 요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明銳) 내지 전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

라고까지 평하여 그의 학문·저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최근에 와서 다산 연구의 열의가 높아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모호한 표현]

[편집] 저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편집] 3대 저서

이른바 '1표 2서'라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는 정약용의 주요 저서로 꼽힌다.

  • 목민심서》 :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 목민관(牧民官, 수령)의 치민(治民)에 관한 요령과 감계(鑑戒)가 될 만한 마음가짐과 태도 등을 이다.* 《흠흠신서》 : 곡산부사로 재직할 때 실제 수사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서술한 판결과 형벌 및 치옥(治獄)에 대한 주의와 규범에 관한 책으로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일을 가벼이 처리하지 않도록 유의할 점을 적었다.
  • 경세유표》 : 관제·군현제와 전제(田制)·부역·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과거제·해세(海稅)·상세(商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국가 경영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준칙(準則)이 될 만한 것을 논정(論定)한 책이다.

[편집] 기타

  •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 정약용이 회갑을 맞던 해 자신이 직접 쓴 자신의 일대기이다.
  • 《논어고금주》
  • 《맹자요의》
  • 《춘추고징》
  • 《상서고훈》
  • 《매씨서평》
  • 《주역사전》
  • 《역학서언》
  • 《대학공의》
  • 《대학강의》
  • 《중용자잠》
  • 《중용강의》
  • 《아언각비․이담속찬》
  • 《문헌비고간오》
  • 《소학주관》
  • 《소학기언》
  • 《심경밀험》
  • 《상례사전》
  • 《상례외편》
  • 《상의절요》
  • 《제례고정》
  • 《의례문답》
  • 《상례작의》
  • 《악서고존》
  • 《시경강의》
  •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 《대동수경》
  • 《풍수집의》
  • 마과회통
  • 《삼미자집(三眉子集)》 : 정약용이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았다가 나았는데, 그때 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렸다. 이 《삼미자집》은 정약용이 10세 이전에 지은 글을 모은 문집이다.

[편집] 가계

  •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28~1775)
  • 어머니: 윤소온(尹小溫, 1730~1770) : 윤두서의 손녀, 윤선도의 오대손녀
  • 형제
  • 부인 : 이씨
  • 아들
  • 손자: 정유역(丁維驛, 1788~1801)
  • 조카
    • 정난주(丁蘭珠, 마리아, 1773~1838) : 정약현의 딸, 황사영[5]의 부인
    • 정학초(丁學草, 1768~1801) : 정약전의 아들
    • 정정혜(丁情惠, 1778~1801) : 정약종의 딸
    • 정철상(丁哲祥, ?∼1801) : 정약종의 아들
    • 정하상(丁夏祥, 1795~1839) : 정약종의 아들
  • 기타
    • 이벽(李檗, 1754~1786) : 처남
    • 황사영(黃嗣永, 1775~1801) : 조카사위, 형 정약현의 사위
    • 황경한(黃景漢, 일명 경헌(敬憲), ?~?) : 조카 정난주의 아들, 형 정약현의 외손자

[편집] 기타

[편집] 노론의 적개심

생전 500여권 이상의 저작들을 출간하였다. 저작들의 대부분은 유배생활 19년간 집필한 것이다.

20세기 초반 까지도 노론계 인사들은 남인에 속하는 정약용을 혐오하였다. 한국에 서점의 개념이 도입된 1890년대 이후, 자유롭게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었음에도 그의 저술들을 외면하였고, 윤치호노론계 인사들은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어젯밤 추도식을 지낸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이다. ...(이하 중략)... 그는 16년 동안 유배 상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

-윤치호일기, 1935년 7월 17일자[6]

노론은 정약용이 죽은지 130년이 지난 뒤에도 정약용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유지하였다.

[편집] 홍국영, 혜경궁과의 관계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가 홍국영의 증조부뻘, 혜경궁에게는 할아버지뻘이 된다.

홍이상의 둘째 아들 홍영(1584년생)과 넷째 홍탁(1597년생)은 13년 나이차였고, 홍영의 증손자 홍중기(홍만용의 아들)와 홍탁의 손자 홍만기가 동갑이었고, 홍탁의 손자 홍만기는 40세가 다된 늦은 나이에 아들 홍중후를 봤다. 홍중후는 1687년생으로 8촌인 홍중해(홍국영의 고조부), 홍중기(혜경궁 홍씨의 증조부)와는 29세와 38세의 나이차이가 난다. 따라서 같은 친척임에도 항렬차가 많이 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