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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노근리 쌍굴다리(양민학살)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59호

길따라 나선 여행

by 낮부엉이 2015. 9. 8.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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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포도축제 방문 기차를 타고 내린 곳이 심천역! 영동역은 복잡하고 심천역은 작고 조용한 역이라

축제때는 번잡을 피해서 드나들기에 적당하단다. 점심을 하기위해 들린곳이 황간이던 모양이다.

축제장으로 나가기 위한 길목이 노른리 쌍굴일줄이야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
사건의 현장였던 경부선 철도교 당시 탄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네모, 세모, 동그라니로 분류해서 흰 페인트칠을 해뒀다.

총탄 박격포탄 그렇게 분류를 한 듯하다.

 

영동포도축제가 목적인지라 버스에서 사진을 찍긴하였지만

신문기사를 통해서 보던 노근리쌍굴(영동~황간, 경부선철길아래)을 보니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저려온다.

 

이슈가 되던 사건도 어느덧 잊혀져간 일이라

검색하고 다시 정리해보자면~~

 

1999년 9월 28일 AP통신(1962년생 최상훈이 폴리처상)에 의해서 전세계적 이슈로 떠올랐다.
노근리를 보도한 미국인 에드워드 데일리는 실제 노근리와는 무관하였고 빨갱이나 좌익들에게 매수당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주장도 있었다.
사건의 현장였던 경부선 철도교위로는 피난민들이 많이 지나갔을 것이고 그 피난민 속에는 불순분자도 있었을 것이다.
다금한 상황에 처한 제 7연대 제2대대는 피난민에 대한 경고를 하기위해 박격포까지 사용해도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사격을 실제 한 경우는 피난민이 미군의 통제에 불응할 경우에 한했다.
그러나 누가 명령을 내렸고 누가 사격을 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 증거는 없다한다.

<위키백과>

 노근리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老斤里良民虐殺事件, 영어: No Gun Ri Massacre)은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국 1 기병 사단 7 기병 연대 예하 부대가 1950년 7월 25일 ~ 7월 29일 사이에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발사를 시작하여, 민간인들을 학살한 전쟁 범죄이다.
노근리 학살사건을 실제 경험했던 생존피해자와 유족들인 정은용, 정구도, 양해찬, 정구호, 서정구씨 등으로 1994년에 구성된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사건 대책위원회(위원장 : 정은용)에서는 사망자 135명,부상자 47명 모두 182명의 희생자를 확인했으며, 400여명의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20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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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

민간조사

군인신분이라 진급실패를 우려한 가해자들의 은폐로 오랫동안 덮여 있었지만,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 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대책위원회 대변인이자 기획위원인 정구도씨가 내외신언론기관을 대상으로 노근리사건 홍보를 적극 전개했다.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울러 정구도 대변인은 진실규명을 피해자 증언채록, 노근리 학살이 있었던 기간의 조선인민보 신문기사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하고 있는 미군작전기록을 수집하여 노근리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1기병사단이 노근리학살을 일으켰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확보하고 노근리사건에 대한 역사학 논문과 국제법 논문도 발표하였다

 

AP통신의 탐사보도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사건 대책위원회 정구도 대변인이 중심이 되어 노근리사건 홍보를 4년간 끈질기게 펼친 결과 문화방송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미국 CNN방송 등에서 보도되고 사건이 점점 알려졌다. 그 결과 노근리사건에 관심을 갖게된 AP취재팀이 1998년 4월에 취재에 착수했고, AP통신의 최상훈 기자, 멘도자 기자 등이 "노근리 학살사건은 진상규명이 되지 않으면 진실이 알려질 수 없는 사건이므로 반드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현장취재, 가해자들과의 인터뷰등의 탐사보도를 시행하여 1999년 9월, 미 제1기병사단이 "미군의 방어선을 넘어서는 자들은 적이므로 사살하라. 여성과 어린이는 재량에 맡긴다." 라는 지시에 의해 노근리 피난민들을 살상한 전쟁범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주한미군이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으나 지금도 노근리학살이 고의적 살인임을 부정하고 있다.

노근리사건 피해자들은 끈질긴 노력으로 2004년에는 사건의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법안인 노근리 사건 특별법이 의회에 참여한 국회의원169명 전원의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신 원

이 사건이 일어났던 경부선 노근리 쌍굴다리는 2003년 6월 30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으며, 충청북도에서도 노근리 학살 사건 희생자들의 신원을 위해 2008년 역사공원 건립을 시작하였다. 역사공원은 2010년 6월까지 191억원을 들여 쌍굴다리 앞 옛 노송초등학교 터를 포함한 13만2240㎡에 조성되어 미군 총격으로 숨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 사건 관련 기록·문서·사진·증언 등을 담을 역사 평화 박물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숙박 기능을 갖춘 문화의 집도 건립되어 청소년 인권·평화·역사 교육장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유가족들도 매년 미군의 폭력으로 죽은 민간인들의 한을 위로하는 제사를 노근리 학살이 일어난 쌍굴에서 지내고 있는데, 미군의 노근리에서의 민간인 학살로 다섯살난 아들과 세살배기 딸을 잃고 부인마저 중상을 입은 노근리 사건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인 정은용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장은 2000년 제사에서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 발표하였다.

“ 저곳 철로 위에서 폭격과 기총소사와 지상군의 소총사격으로 님들은 마구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곳, 쌍굴 안에서 60시간을 갇힌 채 기관총 사격으로 님들은 처참하게 숨져 갔습니다.
우리를 돕겠다고 전쟁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이 땅에 올라온 미군들이 그처럼 무지막지하게 님들을 죽일 줄이야 누가 알기나 했습니까. ”

 

증 언

“ 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총을 쏴라.모두 쏴죽여라."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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